속초고성양양의 역사

송시열과 속초<5>물치주시(勿緇柱詩), 누구와 연관된, 누구를 빗댄 글인가

속초애인 2024. 6. 21. 15:35

■연재를 이어가며
우암의 일행은 비를 피하기 위해 내물치촌(內勿淄村)의 정립(鄭岦)이라는 양인(良人)의 집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물치주시(勿緇柱詩)라는 내용이 전하는데, 삼전시호인개신(三傳市虎人皆信), 일철군봉부역의(一鐵裙蜂父亦疑), 세상공명간목안(世上功名看木雁), 좌중담소신상구(座中談笑愼桑龜)라 한다.
문장의 의미는 차례대로 ‘저잣거리(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세 사람이 말하면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자식이라도 어미의 치마 속에 들어간 벌을 잡으려고 옷을 들추면 아비마저도 자식을 의심한다.’ ‘산에 있는 큰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도끼에 찍히는 재앙을 면하고, 반면에 울지 못하는 기러기는 쓸모가 없다고 하여 요리상에 오른다.’ ‘좌중에서 한가하게 담소하는데 있어서도 치명적인 실수를 경계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이 글에 대해 우암은 이숙고의 답장에서 허암 정희량이 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권구는 조광조가 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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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치주시(勿緇柱詩)의 주인공
『송자대전』과『탄촌선생(灘村先生) 문집』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을 살펴본다.

 

1. 정희량(鄭希良, 1469 ~?, 이하 허암)
먼저 우암이 물치주시의 주인공으로 추측한 정희량(鄭希良)은 우리에게 익숙한 ‘신선로〔신선로(神仙爐) 또는 열구자탕(悅口子湯), 한국의 궁중 음식에 속하는 전골요리〕’라는 음식을 알려준 인물로 전해지는데, 음양학(陰陽學)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시습으로부터 선도(仙道)를 전수받았다. ≪성호전집≫ 제8권 해동악부(海東樂府)에서 이르기를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은 자가 순부(淳夫)이다. 일찍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말하기를 “아무 간지(干支)에 태어났다면 흉할 것이다.” 하고는 매양 세상을 피해 은둔하려는 뜻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는데 무오사화 때 의주(義州)에 유배되고 김해(金海)로 이배(移配)되었다가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석방되었다.
1502년 모친상을 당하여 고양(高陽)에서 시묘살이를 할 때에 하루는 갑자년에 사화가 있을 것을 알고 말하기를, “무오년보다 심하리라.”하며 종들을 여기저기 보내어 어른은 땔나무를 해 오게 하고, 아이는 나물을 캐 오게 하였는데, 종들이 돌아오니 정공은 집에 없었다. 샅샅이 자취를 찾았는데 단지 모래사장에 벗어 놓은 신발만 발견되었으므로 강에 빠졌는가 의심하였지만 끝내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 이날이 5월 5일(물치주시에서 언급한 날짜와 같음)이다. 혹자가 연산군에게 정희량을 물색할 것을 아뢰자, 연산군이 말하기를 “미친놈이 도망가 죽었는데 뭐 하러 찾는단 말인가.” 하여 찾지 아니 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가천원(加川院) 벽 위에 적혀 있던 시 두 구절이 필시 허암이 지은 글이라고 하였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새는 무너진 담 구멍을 엿보고(鳥窺頹院穴) / 중은 석양에 물을 긷는구나(僧汲夕陽泉) / 산수로 집을 삼은 나그네이니 (山水爲家客) /천지간 어느 곳에 있으랴 (乾坤何處邊) / 비바람이 전날 세상을 놀래더니(風雨驚前日) / 문명이 이 시대를 저버렸구나(文明負此時) / 쓸쓸히 지팡이로 천지를 떠도니( 孤筇遊宇宙) / 시끄러움이 싫어 시마저 그만두네( 嫌鬧幷休詩)
묘향산(妙香山)에서 정희량(鄭希良)을 만났던 점쟁이 김륜이 일찍이 그를 따라 다니다가 그가 기록한 생년월일시의 오행(五行)을 본 적이 있었는데, 서울에 와서 신경광(申景洸)이 선비와 현달한 관인들의 오행을 적어 놓은 책을 보다가 허암의 오행에 이르러서 깜짝 놀라며 “이는 우리 스승 이천년(李千年, 허암의 가명)의 팔자이다.”라고 하였다.
또, 《연려실기술》에는 수재(秀才) 혹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라고 한다. 수재가 산중에서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는데, 한 늙은 중이 곁에 있다가 그 태도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이따금 구두의 틀린 것을 고쳐 주었다. 수재는 그 중이 허암(정희량의 호)인가 의심이 나서, “당신이 주역을 아시오?” 하니, 중은 “모르오.” 하고 사양하였다. 또 “주역의 내용은 매우 깊어서 읽기 어렵소.” 하니, “선비의 주역 읽는 것을 보니 능히 통달하였소.” 하였다.
또 문답하기를, “당신이 정허암을 아시오?” 하니, “모르오.” 하였다. “허암은 정희량의 호입니다.” 하니, “그 성명은 자못 듣고 있으며 그 사람된 품도 대강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허암이 종적을 숨기고 나오지 않으니, 아까운 일입니다.” 하니,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정아무(鄭某 정희량을 말한다)는 어버이의 상중에 시묘살이를 하다가 상례를 마치지 못했으니 불효요, 임금의 명을 피해 도망갔으니 충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효도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하여 죄가 크니 무슨 낯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겠습니까.” 하고, 조금 후에 작별하고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고 전한다.
허암이 강물에 빠져 죽은 뒤에 서쪽 지방(평안도)의 산승(山僧)들이 혹은 괴이한 중이 이 산 저 산을 왕래한다고도 하고, 혹은 허암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분명히 보았다 하기도 하고, 혹은 장발(長髮)의 방사(方士)가 자취를 숨기고 왕래하면서 승려들에게 시를 지어 주면 사람들이 다투어 외운다고도 했다. 즉, 허암은 모래사장에 벗어 놓은 채 사라졌고, 자기의 신분을 감춘 채 전국을 유랑하였고 자신의 생각을 시로 만들어 다른 사람들이 세상에 전파하게끔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해주정씨 종친회(海州鄭氏宗親會)에 의하면, 정희량은 1530년에 전국을 떠돌다 죽었다고 한다.

 

2. 권구(權絿, 1658~1731)
『탄촌선생(灘村先生) 문집』의 저자인 권구는 강원도 고성출신으로 우제(迂齋) 조지겸(趙持謙)과 명제(明齋)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창협(金昌協), 이세필(李世弼),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고,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감역(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학문에서는 장구(章句)를 분석하고 해석하기보다 근본원리를 통찰하고 실천하는 데 힘썼다. 특히 예학에 뛰어나 「오복편람(五服便覽)」, 「예요오자고(禮要誤字考)」, 「상복편고(喪服便考)」 등의 저술을 남겼다. 중요한 것은 권구의 스승인 조지겸은 우암과 경쟁관계이자 원수지간인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친구이고, 윤증(尹拯, 1629∼1714)은 윤선거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3. 조직(趙溭, 1555~1612)
 권구가 물치주시에 대해 들었다는 조신운(趙莘雲)의 아버지 조직(趙溭)은 국조인물고에 의하면 광해군 당시의 인물로 조수륜(趙守倫, 성혼의 문인) 밑에서 공부하고, 다시 문위(文緯)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의 폐모사건이 일어나자, 나라의 기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아우 옥(沃)에게 부모의 봉양을 부탁한 다음 분연히 폐모반대의 항소(抗疏)를 올렸는데, 그 때 나이 22세였다.
광해군은 크게 노하여 반드시 뒤에 사주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정국(庭鞫)을 열어 엄히 신문하였지만, 끝내 조정의 그릇된 처사를 바르게 하려는 뜻에서였음을 진술하고, 이듬해 남해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석방되어 호조좌랑에 제수되었다가 형조좌랑으로 옮기고 이어 형조정랑으로 승진되었으며, 1631년 간성(杆城)군수, 1634년(인조 12년)에는 양성 현감(陽城縣監)으로 나갔다. 1635년(인조 13년) 가을에 그만두고 돌아와 1637년(인조 15년)에 양친(兩親)을 모시고 관동(關東)에 들어가 양양(襄陽) 땅에 우거(寓居)하여 그대로 살다가 생을 마칠 뜻을 가졌다(1637년 7월부터 1643년까지는 양양 거주). 1643년 고성(高城)의 군수를 지냈다. 시문과 서화에 능했는데,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 1658년(효종 9) 좌승지로 추증되고, 그 이듬해 대사헌으로 추증되면서 한천군(漢川君)에 추봉된 인물이다.
 권구의 친구인 조신운(趙莘耘)은 조직의 막내아들이다.
 

 

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광조(趙光祖)는 역사의 기본상식만 있어도 아는 인물이니, 너무나 곧은 사람이었기에 일찍 부러진 표본이었다. 과거시험을 없애고 천거제(薦擧制)를 실시하고, 소격서(昭格署, 조선시대 도교의 행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를 폐지한 그는 유교 국가임을 내세운 조선 왕조가 유교적 가르침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광조는 평생 이러한 원칙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던 사람이다.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로(己卯士禍)로 죽음을 당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물치주시를 썼을까? 더불어 누구를 빗대어 쓴 글일까?
물치주시의 내용이 기존의 『한비자(韓非子)』, 『장자(莊子)』에 나오는 글귀이며, 장자(莊子)의 좌우명이라는 설도 있기에 새롭게 창작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연관된, 누구를 빗댄 글인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계속>
정상철
속초문화원 부설 속초시향토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