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이어가며
『송자대전』과『탄촌선생(灘村先生) 문집』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1, 정희량(鄭希良, 1469 ~?) : 1502년 잠적 이후 전국을 돌며 유량생활.
2. 권구(權絿, 1658~1731) : 조직의 이야기를 탄촌문집에 남김.
3. 조직(趙溭, 1555~1612) : 양양거주 시 아버지가 쓴 상소문에서 물치주시 내용을 목격함.
4. 조광조(趙光祖, 1482~1519) : 조선 중종 때 사림파의 대표로 급진적인 사회개혁정치가.
그렇다면 과연 누가 물치주시를 썼을까? 더불어 누구를 빗대어 쓴 글일까?
물치주시의 내용이 기존의『한비자(韓非子)』,『장자(莊子)』에 나오는 글귀이며, 장자(莊子)의 좌우명이라는 설도 있기에 새롭게 창작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연관된, 누구를 빗댄 글인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이 글에 대해 우암은 이숙고의 답장에서 허암 정희량이 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권구는 조광조가 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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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글쓴이의 그 주인공을 찾고자 한다면, 첫 번째, 우암이 추측한 ‘정희량설’과 권구의 ‘조광조설’로 좁힐 수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전 양양문화원장을 지낸 양동창님의 「한자이야기」에서는 ‘문화원 전 이사이신 문동재(文東在)씨와 물치리 이덕우(李悳雨)씨에 의하면 이 시는 “송강 정철(鄭哲, 1536~1593)이 우암 송시열을 충고하려고 쓴 시라고 하는 설”과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썼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정철설’은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관동을 유람하다 이곳에 들려 물치주시를 썼는데, 그 중 ‘좌중담소( )상구[座中談笑(愼)桑龜)]’ 문장에 ‘신(愼)’자가 들어갈 곳을 비어놓아 후에 우암이 그 글을 보고 ‘신(愼)’자를 적어 넣었다고 한다는 설이다. 이 설이 맞다면 우암의 상구(桑龜)관련 글에 이 내용이 나와야하는데 송자대전에는 그 내용이 없다.
‘이산해설’은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인물로 보자면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다. 당대의 문장가이며 동인(東人)의 영수로 영의정(領議政)시절 한때 친구였던 정철을 탄핵한 장본인이며, 조광조의 사후(事後) 1583년에 조광조의 비문(碑文)과 비음기(碑陰記, 비석 뒷면에 새긴 글)를 지은 사람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정희량은 무오사화 때 사초문제(史草問題)로 윤필상(尹弼商) 등에 의해 신용개·김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았는데, 난언(亂言)을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장(杖) 100대, 유(流) 3, 000리의 처벌을 받고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1500년 5월 김해로 이배되었다. 1502년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 갑자사화를 예견하고 갑자기 사라진 인물이다. 세상의 권력을 누렸다기보다는 세상을 내다보고 희망이 없음을 예견하여 자신의 삶을 위해 세상을 등진 사람이다.
‘정희량설’에 힘을 실어준다면, 정희량은 김전(金詮)·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될 정도로 문명(文明)이 있었고, 음양학(陰陽學)에도 밝은 인물이다. 또한 설악산에서 기거했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으로부터 선도(仙道, 신선의 도)를 전수받았으니, 기록에는 없지만 이 고을에 다녀갔을 확률 또한 높다.
물치주시의 출처가 『한비자(韓非子)』,『장자(莊子)』이니 한비는 반유가(反儒家)사상의 선봉인 법가사상(法家思想, 인간의 모든 활동은 통치자와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상)의 대부이고, 장자는 노자와 함께 도교의 사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완성시킨 사람이니, 음양학과 주역에 밝은 정희량이 위의 책들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1502년 사라진 후 승려도 아니고 도인도 아닌 행색으로 전국을 유랑하다 승려들에게 시를 지어 주면 사람들이 다투어 외워서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전파하게 하였고, 가천원(加川院)의 벽과 김륜(金倫)에게 남긴 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대화내용처럼 이 곳 물치촌에 들려 인생무상(人生無常)의 글을 적어놓았을 것이다.
두 번째, 쓰여진 연대가 확실한지 봐야 할 것이다. 물치주시가 쓰여진 집주인 정립이 말하기를 “1674년(갑인년) 5월에 승려도 아니고 세속 사람도 아니며 선비 같기도 하고 천인(賤人) 같기도 한 어떤 사람이 이 글씨를 써 두고 가면서 내년 5월 5일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는데……”하였다. 그렇다면 이 글의 1674년경에 이곳을 다녀간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1674년이라는 집주인의 증언을 연대의 절대적인 증거로 채택한다면, ‘정희량설(1469~?)’과 ‘조광조설(1482~1519)’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두 사람 모두 1674년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정희량이 설마 도인(道人)이라 할 지라도 200세 이상 살 수 있을까? 송강 정철(1536~1593)과 이산해(1539~1609)의 생몰년도 마찬가지이다.
권구의 글에 나오는 조신운의 아버지인 조직이 양양에 있을 때 유배당한 죄인들의 하소연과 귀양살이 당시의 일들을 모아 쓴 것으로 보이는 상소를 올렸으니, 조직이 양양에 있을 때가 1637년 7월부터 1643년까지이고, 갑인년 전에 어떤 사람이 글을 남겼다고 하였으니 물치주시는 적어도 1674년(갑인년)보다 60년 전인 1614년(갑인년) 이전에 쓰여진 글이 된다.
따라서, 1674년에 썼다는 집주인의 말은 물치주시 일화를 미화하는 과정에서 현실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을 확률이 높다.
다음 물치주시가 누구를 훈계하는 글인가에 대해서는, 아시다시피 물치시주와 관련된 인물은 우암으로, 우암을 거북이에 비유하여 천하의 현인이나 권력자인 우암도 헛소문과 모략에 휘말려 결국은 왕의 의심을 받고 불행한 최후를 맡게 될 것이라고 교훈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서 우암과 빗대어 얘기한다면 우암을 존경하거나 우암이 걱정되어서 쓴 것이 아니라, 우암의 운명을 조롱하고 훈계하는 또는 비슷한 운명을 가진 사람에게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암이 지나간 후에 우암을 흠모하던 물재 유회일이 그 집에 기거하면서 글씨를 지웠다는 것을 봤을 때도 우암의 칭송하는 글은 아니다. 물재가 자신의 스승을 모독하는 글을 그냥 놔 둘리 없었을 것이다.
우암 또한 김연지와의 오고간 편지에서 “그러니 오늘날 좌중에서 한가하게 담소하는데 있어서도 경계할 줄 알아야 하겠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이야 이미 솥에 든 고기가 되었으니 털을 태워도 곧 익어 문들어지게 되었네. 어찌 뽕나무까지 쓸 필요가 있겠는가……<중략> 이 일은 몹시 이상하나 또한 함부로 이야기를 하지는 말게.”라고 말하였으니 우암에게도 얼마나 충격적이고 참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겠는가?
또한, 조광조를 빗대어 얘기한다면 그의 몰락과정을 보면 물치주시의 내용과 거의 들어맞는다.
조광조를 몰락시킨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14년) 11월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훈구파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정치(理想政治)를 주장하던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의 신진파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인데, 수세에 몰리던 훈구파는 마침내 조광조를 몰아낼 무고(없는 일을 거짓으로 꾸며 남을 고발하거나 고소함)를 꾸몄다.
홍경주·남곤·심정 등은 경빈 박씨(敬嬪朴氏) 등의 후궁을 움직여 궁중의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주초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됨. 곧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란 글씨를 쓰고 꿀물을 무수히 바르게 하여 벌레로 하여금 갉아먹게 하고, 궁녀들이 이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을 모아 임금에게 바쳤다. 또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무고했다. 곧 공신들을 헐뜯어 몰아내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끊임없이 모략질을 해댄 것이다.
좀 더 폭넓게 생각해 본다면 조광조와 송시열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이 글을 보게 되더라도 이 글의 교훈에 들어맞는 인생을 가졌다면 같은 처지가 되었다면 그 누구도 이 글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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