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이어가며
때는 1675년 5월 5일 우암의 유배행렬은 장사동 고개를 넘어 영랑호 근처에 다다른다. 고성의 삼일포, 청간정, 동해의 해암정 등을 거쳤듯이 우암은 고려 때부터 유명한 양양지방의 영랑호를 그냥 지나쳐 가지 않았다. 우암은 영랑호의 경치를 보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우암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있는 호수에 대해 마중 나온 사람에게 ‘이 호수는 영랑호라고 불리는 호수인데, 신라시대 때 영랑(永郞)이라는 화랑(花郞)이 전국 유명산천을 다니다가 이곳에 매료되어 일정보다 며칠 더 머물다 간 곳이다’라는 설명을 듣고 글을 쓰기를 청하였을 것이다.
영랑호(永朗湖)!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영랑호(永朗湖)의 한자는 ‘밝은 랑(朗)’이 아닌 ‘사내랑(郞)’을 쓰는 영랑호(永郞湖)이다. 잘못 쓰인 것이다! 유풍악기《游楓嶽記》의 저자 김유(우암의 제자)도 이 상황을 그의 글에서 지적하고 있으며, ‘어찌 이런 뜻이 있겠는가?’하며 한탄하고 있다.
반면 이희조(李喜朝)는 그의 저서인 명암집《鳴巖集》의 「영랑호(永郞湖)」라는 시에서 주석으로 ‘영랑호(永郞湖) 석자가 새겨서 있는데, 우옹(尤翁)의 글씨이다.’라고만 썼으며, ‘랑(朗)’자도 원래의 ‘랑(郞)’자로 표현했다.
김유, 이희조 두 사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면,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김유(1653~1719)는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사직(士直), 호는 검재(儉齋). 할아버지는 극형(克亨)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징(澄)이며, 박세채(朴世采)·우암의 문인이다. 일찍이 학문에 조예가 깊어 박세채가 그의 후계자로 지목하였으며, 우암도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겼다. 1674년(현종 15)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로 박세채·우암이 화를 당하자 이천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1689년 금강산을 유람하였으며, 김창흡(金昌翕), 김창협(金昌協), 이관명(李觀命) 등과 교유했다. 아시다시피 김창흡(金昌翕)은 설악산에 영시암(永矢庵)을 짓고 일시 기거한 인물이다.
이해조(李海朝, 1660~1711)는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동(子東), 호는 명암(鳴巖). 대제학 일상(一相)의 아들로 1681년(숙종 7)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89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자 벼슬을 단념하였다가 1694년 왕후가 복위된 뒤에 빙고별검(氷庫別檢)이 되었다. 이어서 공조·호조낭관을 거쳐 전주통판(全州通判)을 지내다가 1702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한 뒤 응교·부교리·집의·대제학 등을 역임하고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할아버지 이래 3대가 대제학을 지냈으며, 시문에 뛰어나 김창흡(金昌翕)으로부터 천재라는 격찬을 받았다. 저서로는 『명암집(鳴巖集)』이 있다.
그런데, 같은 글을 보고도 왜 두 사람은 다른 글자(朗, 郞)를 자신들의 글에 남겼을까? 또, 김유와 이희조(李喜朝)는 왜 자신들의 문집에 우암의 흔적을 남겼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사람 모두 우암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김유는 우암의 직속제자이고, 이해조는 우암의 직속제자인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으로부터 천재라는 호칭을 들은 인물이다.
또한 이해조는 시인(時人)으로 1709년에 양양부사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며, 재직시절에 현산30영〈峴山三十詠〉을 짓기도 하였다.

필자가 ‘랑(朗)자’의 오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것은 첫째 우리나라에서 송자(宋子)로 불리울 만큼 그의 학식이 고귀한데 설마 ‘영랑호(永郞湖)’라는 한자를 몰랐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다. 우암 혼자 영랑호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를 따라 다니는 많은 유생들과 영랑호를 잘 아는 주위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영랑호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우암이 바위에 직접 글을 쓰고, 석공(石工)이 바위를 다듬었는지, 아니면 우암이 종이위에 쓴 글을 보고 석공이 모양을 흉내 낸 것인지는 아직 전문가의 필체감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섣불리 판단하기는 이르다.
양양지역을 벗어난 우암의 행적이긴 하지만 우암의 유배길이 양양을 지나 강릉의 경포호에 다다랐을 때 호수 한 가운데 있는 바위에 각종 철새들이 찾아와 노는 곳으로 ‘새바위’라고 한다며, ‘조암(鳥岩)’이란 글씨를 남겼다. 또한 동해의 해암정(海巖亭)에 들렀을 때에는 정자 안에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 라는 글을 남겼다. 그만큼 각 고을을 지날 때 마다 글을 남겼고, 각 지방관리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암이 유배 길에 이르면서 흔적(자신의 심정)을 남긴 것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덕원의 철령에서 ‘머리 돌려 서방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 가리어져 걷히지 않네. 서방 사람에게 말하노니 붉은 노을에 밝은 달빛 차소서.’라며 아직 자신에게 희망, 빛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동해의 해암정에서도 ‘풀은 구름과 어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의역 : 구름이 풀을 안고 깊고도 좁은 길을 구불구불 돌아든다)’라며 험난한 역경을 이겨나가려고 희망찬(밝은)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1680년 전남 보길도에서도 ‘초구(임금이 하사한 담비 갖옷)에는 옛 은혜 서려있어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라며 비록 자신은 억울함을 당해 유배당했지만, 아직 임금에 대한 사랑(빛)은 남겨놓았다.
즉, 유배 길에 깃든 우암의 마음은 비록 자신의 현재 신세는 보잘것없이 변해버렸지만, 내일(성군)에 대한 희망(다시 불러줌, 빛)이 가득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우암이 지은 시문에서 빛(희망)을 광(光), 화(火), 명(明) 등으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우암은 영랑호 ‘랑(郞)’의 음을 빌어 ‘밝을 랑(朗)’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둘째 김유의 한탄적인 문장에서 우암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어찌 이런 뜻이 있겠는가?(豈有其意歟)’ 앞서 언급했듯이 김유는 박세채(朴世采)·우암(宋時烈)의 문인(文人)이다. 문인(文人)이란 즉, 절대적인 스승이며 뜻을 같이 한다는 뜻이다. 찬수낭관(纂修郎官) 재직 시 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한 인물로 그만큼 지리에도 밝은 인물이다. 김유는 1674년(현종 15년)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로 자신의 스승인 우암이 화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이천에 은거하기도 하였다.
「유풍악기」에 의하면 김유가 영랑호에 들른 것은 1709년 5월 9일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암의 영랑호 관련 시를 남긴 이해조가 양양부사(1709년 2월~1710년 3월)로 재임하고 있을 때이니, 두 사람이 서로 같이 만나 영랑호를 유람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7살의 나이차가 있지만, 두 사람이 요즘말로 ‘절친(친한 친구)’일 가능성은 김유가 이해조의 제문(祭文, 죽은 사람이나 천지 산천의 신에 대해 애도의 뜻, 또는 어떤 목적의 생각을 표한 글)을 지었기 때문이다. 제문은 평소 돌아가신 분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쓰는 것이 보통이다.
김유의 『검재집』 해제에도 두 사람이 교우했다고 적혀있다. 설악산 봉우리(울산바위)가 영랑호 호수에 투영된 모습을 보며 한사람(이해조)은 시(時)를 짓고, 마지막에 ‘영랑호에 우옹(尤翁, 송시열을 가르킴)이 쓴 글자가 있다’는 주석을 달았고, 또 한사람(김유)는 랑(郞)이 랑(朗)자로 바뀌었다며 ‘어찌 이런 뜻이 있겠는가?’ 하며 한탄하는 문장을 기행문에 남겼다.
의미심장한 건 김유가 우암의 실수를 지적하여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히 스승의 실수를 한탄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한탄을 해야 한다면 “‘이런 뜻(意)’이 있겠는가?” 가 아니라 “‘이런 실수(失手)’가 있겠는가?” 하고 한탄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김유의 표현은 반어적(反語的)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듯 싶다. 즉 영랑호(永朗湖)를 ‘영원히 밝은 호수’로 자신에게 불어닥친 핍박(무고)이 억울하지만, 그래도 왕에 대한 자신의 희망을 나타내려는 의도로 해석함이 바로 실수(失手)가 아닌 그 뜻(意)! 우암의 심경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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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철
속초문화원 부설 속초시향토사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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