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고성양양의 역사

송시열과 속초<2> 우암의 유배행렬은 장사동 고개 넘어 영랑호 근처에 다다른다

속초애인 2024. 6. 21. 15:24

■연재를 이어가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조선 최대의 당쟁가!!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우암은 ≪의례≫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외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덕원지방의 유생들이 그를 따르고, 우암 또한 그들이 모이는 것을 만류하지 않아 결국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우암의 귀향이 결정된 후, 부제학 김석주의 상소, 좌의정 정치화의 상소, 김수항의 사표, 풍양군 장선징의 상소, 우암의 제자인 집의 윤증의 사직 등 우암과 뜻을 같이하는 신료들이 숙종을 설득하였으나 그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1675년 1월 13일에 우암은 함경도 덕원부(德源府)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전국의 선비들이 흠모했던 노론의 영수인 우암의 명성은 함경도지방에서도 자자하였다. 우암이 덕원에서 경북 장기(長?)-지금의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로 유배지가 바뀐 이유가 여기에 있다.
1675년 윤5월 15일, 대사헌(大司憲) 윤휴(尹?), 장령(掌令) 조사기(趙嗣基), 지평(持平) 유하익(兪夏益)·이항(李沆) 등이 말하기를, “송시열이 덕원(德源)에 이르매 문생(門生)들이 따라간 자가 많았으며, 북쪽 땅의 선비들도 또한 모여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다. 송시열은 이러한 자들을 거절하여 보내지 아니하고 강론(講論)하기를 옛날처럼 하였으며, 귀향 가던 도중, 철령(鐵嶺)에 올라 시(詩)를 지었으니…옛 정승 송시열(宋時烈)을 남변(南邊)에 안치(安置)하고옵소서.”하니, 임금이 즉시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우암이 덕원에서 장기, 웅천, 거제 등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 이유는 장선징이 판의금부사(判金吾)로 있을 적에 덕원(德源)은 장기-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가 없는 곳이라 하여 우암의 배소(配所)로 정한 바, 당시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이를 크게 한(恨)하고 다시 남쪽으로 옮기기를 청하여 웅천(熊川)으로 귀양을 보냈으니, 웅천은 장기가 가장 심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우암이 귀양을 가고 나서 한양의 정치판은 우암의 죄를 형률(刑律)을 더하여 사형(死刑)으로 처치하려 하였으나, 마침 이정(李楨)과 이연의 일-숙종 원년(1675) 3월에 복창군(福昌君) 정(楨)·복평군(福平君) 연형제가 궁중에 무단출입하면서 궁녀(紅袖) 상업(常業)·귀례(貴禮)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오다가 함께 귀양 간 사건. 즉 홍수(紅袖)의 변(變)을 말함-이 발각됨으로 인해 정지되었다.
우암이 철령에 올라 지은 시는 다음과 같은데,
<登鐵嶺吟(乙卯正月二十四日)>
行登鐵嶺전(행등철령전) 가다가 철령 꼭대기에 오르니/我心還如鐵(아심환여철) 내 마음은 도리어 쇠 같도다/縱乏器之誠(종핍기지성) 유기지의 정성은 부족하지만/却耐西山血(각내서산혈) 채서산의 피는 감당할 수 있다네/回首望西方(회수망서방) 머리 돌려 서방을 바라보니/陰雲壅不決(음운옹불결) 검은 구름 가리어져 걷히지 않네/願言西方人(원언서방인) 서방 사람에게 말하노니/丹霞佩明月(단하패명월) 붉은 노을에 밝은 달빛 차소서<출처 : 登鐵嶺吟(乙卯正月二十四日) 한국학술정보(주)>
‘귀양 가다가 철령 꼭대기에 오르니, 내 마음은 도리어 쇠 같다. 유기지만큼의 정성은 부족하지만, 귀양 가면서 흘리는 피는 채서산의 피처럼 감당할 수 있다. 머리 돌려 임금 계신 서방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자신을 유배지로 보낸 간신인 남인을 비유) 가리어져 걷히지 않고 있다. 서방 사람(임금)에게 말하노니, 붉은 노을에 밝은 달빛 차소서(밝은 마음을 지녀 시비(是非)를 잘 가려 달라).’
즉, 우암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못함이 억울하며, 성군께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날이 곧 오리라는 희망을 암시한다.
우암은 그래도 정승을 지낸 사람이니 귀향 가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수행원들이 그를 우대했을 것이다. 우암의 손자인 봉곡(鳳谷) 송주석(宋疇錫)은 우암이 덕원(德源)으로 귀양갈 때 동행하여 임금에 대한 충성, 유배의 원인, 정적에 대한 적개심, 노정기(路程記) 등을 읊은 유배가사인 북관곡(北關曲)을 짓기도 하였다.
또한 덕원에서 장기로 이배되는 동안 지나가는 고을의 여러 명소에 들려 흔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동해시에는 삼척 심씨의 시조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제자를 가르치며 생활할 때 지은 정자인 ‘해암정(海巖亭)’이 있는데, 그 안에는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 라는 글이 있다. ‘풀은 구름과 어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의역 : 구름이 풀을 안고 깊고도 좁은 길을 구불구불 돌아든다)’는 뜻으로 우암이 덕원에서 장기로 이송되어 가는 도중에 들러 남긴 글이라고 한다.

 

■속초와의 인연
1. 영랑호를 지나며
우암은 덕원(德源)으로 유배갈 때 그를 따라간 문생(門生)들이 많았고, 덕원지방의 선비들도 그에게 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는데 우암은 이러한 자들을 거절하여 보내지 아니하고 강론(講論)하기를 옛날처럼 하였으며, 가던 날 철령(鐵嶺)에 올라 시(詩)를 지었으니 유배지를 남변(南邊)으로 옮기라는 사간(司諫)들의 청에 따라 장기로 이배되게 된다.
때는 1675년 5월 5일 우암의 유배행렬은 장사동 고개를 넘어 영랑호 근처에 다다른다. 당시 우암이 도착한 영랑호 북쪽은 간성군 지역으로 윤세장(尹世章) 간성군수(1672~1676)가 같이 왔을 것이다.
고성의 삼일포, 청간정, 동해의 해암정 등을 거쳤듯이 우암은 고려 때부터 유명한 양양지방의 영랑호를 그냥 지나쳐 가지 않았다. 우암은 영랑호의 경치를 보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후에 일이지만 우암은 1680년 유배에서 벗어난 후,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訴)를 올렸다가 또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압송되는 도중에 전남 보길도에서 읊은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세상에 대한 억울함과 임금에 대한 그리움, 희망이 남아 있으며, 위에 언급한 철령을 지나면서 읊은 시에도 같은 감정이 드러나 있다.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83세 늙은 이 몸이/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한 마디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세 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 뿐이네./貂舊萬恩在(초구만은재) 초구(임금이 하사한 담비 갖옷)에는 옛 은혜 서려있어/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
다시 영랑호에서 서쪽에 우뚝 솟은 울산바위와 동쪽의 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우암을 상상해본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재상출신이 이 고을에 왔으니, 당연히 양양도호부사는 간성군(杆城郡, 지금의 고성군)과의 접경지역에서 우암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양양도호부사(襄陽都護府, 정4품 벼슬이 다스리는 고을)는 안명로(安命老)로인데-양양군읍지 선생안에는 1673.12~1675.7월까지 재임기록이 있다-예전에도 그랬듯이 양양관아에서 40리나 되는 길을 달려 우암을 맞이하러 나왔을 것이다.
다만, 안명로는 남인(南人, 우암의 서인과 적대적 관계)으로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유배 중 사망하였는데, 경신대출척으로 기사회생한 서인의 영수인 우암에게는 냉소적이었지 않았을까? 우암을 양인(良人)의 집에 기거하게 한 것도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우암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있는 호수에 대해 마중 나온 사람에게 ‘이 호수는 영랑호라고 불리는 호수인데, 신라시대 때 영랑이라는 화랑(花郞)이 전국 유명산천을 다니다가 이 곳에 매료되어 일정보다 며칠 더 머물다 간 곳이다’라는 설명을 듣고 글을 쓰기를 청하였을 것이다.
<계속>
정상철
속초시 향토사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