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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속초<1>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 붙인 인물

속초애인 2024. 6. 21. 15:21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조선 최대의 당쟁가!!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까지 연상하게 만든 그는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儒敎)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송시열은 우리나라 학자 중 퇴계 이황(이자)를 제외하고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현재 전국에 내놓으라하는 유학자들 중에서 송시열선생을 추앙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존하는 전국의 서원들 중에 수많은 서원들이 송시열선생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死後)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조선시대에 설립된 서원 가운데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된 서원)만 37개소나 달하였다.
또한, 숙종 때를 제외하고는 역모가 아닌 경우 대신을 사형시킨 예가 없고 국문도 하지 않을 만큼 대신을 우대한 조선에서 그는 ‘죄인들의 수괴(首魁)’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사사(賜死) 당했는데, 그는 죽고 난 이후 다시 노론의 재집권과 함께 유학자로서의 최대 영광인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되고, 공자, 맹자, 주자처럼 송자로 불리는 영광을 누렸다.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저자인 이덕일(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은 책머리에서 “우암 송시열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지인(知人)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쓸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저자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310여년 전에 죽은 그는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송시열이 얼마나 무섭고,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필자는 3여년 전부터 김유의《검재집(儉齋集)》에 실린 <유풍악기(游楓嶽記)>와 이해조의《명암집(鳴巖集)》에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랑호(永朗湖) 친필 3글자가 있다는 내용을 발견하고, 영랑호 주변을 찾아다녔지만, 철책이 있고 수풀로 가려진 탓에 찾지 못하였다. 역시 주인(발견자)은 따로 있나보다.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이를 발견하고 신고해 주신 주민 덕분에 우암의 친필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필자에게 이와 관련 된 글을 쓸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송시열의 생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송시열(1607~1689, 이하 우암이라고 씀)은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년)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 擊蒙要訣≫·≪기묘록 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후일의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그가 올린 <기축봉사 己丑封事>는 그의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中華)를 명나라로, 이적(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우암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에 <정유봉사 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그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그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우암은 ≪의례≫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외규정(四種說)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결국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 조선시대 공신·공신적장(功臣嫡長)·동서반 당상관 등이 치사(致仕)한 뒤에 임명되는 관직}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壬申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세자 예정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 시장(諡狀, 업적을 왕에게 알리기 위해 쓴 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유배의 길
숙종실록에 의하면 1675년 1월 7일(숙종 1년)에 장령(掌令) 남천한(南天漢)·정언(正言) 이수경(李壽慶)이 “우암은 2차 예송 이후로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하여 명예를 탐내고 의리를 꾸며서 대의(大義)를 자기 임무로 삼고 효종께서 장차 크게 쓸모가 있을 때에 제 뜻이 펼쳐지기를 바랐거니와, 어찌 우암의 성질이 매우 어그러지고 간사하며 식견이 치우치고 완고하다”하여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이 따르지 않다가, 1675년 1월 12일 사간(司諫) 김빈·장령(掌令) 오정창(吳挺昌)·헌납(獻納) 이우정(李宇鼎)·정언(正言) 목창명(睦昌明)이 임금 앞에 나아가 김빈이 먼저 전에 아뢴 것에 따라 송시열(宋時烈)을 멀리 귀양보낼 것을 청하고, 또 오정창과 함께 각각 지난에 아뢴 것에 따라 이유태(李惟泰)를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黜送)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오정창이 우암에 관한 계청을 윤허하기를 힘껏 청하고 이우정 등이 사연을 같이하여 청하되, 진정(鎭靜)이니 인협(寅協)이니 하는 따위의 말로 임금에게 면대하여 속이니, 임금이 믿고 문득 말하기를, “그러면 송시열을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한다. 실록에서는 “이날 영두성(營頭星)이 서북으로 떨어졌다.”하여 결국. 우암의 귀향은 오정창과 이우정 등의 간괴로 귀향 보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계속> 
정상철
속초시 향토사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