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선시대
○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동해안에 수군기지 6곳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양양북쪽에 ‘속초포’가 있다고 했는데, ‘속초’라는 지명이 나타난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이다.
○ 향성사의 후신인 선정사는 900여 년간 그 자리를 지켜오다가 조선시대인 인조 20년 (1642)에 화재가 나서 완전히 소실되고 만다. 이에 인조 22년(1644)에 영서, 혜원, 연옥 등이 선정사 아래쪽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1649년에 완성하였는데,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고 하였다.
○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청초호가 ‘쌍성호(雙城湖)’라고 기록되어 있다. 1757년에 왼성된 《여지도서》에는 청초호가 ‘쌍성호(雙成湖)’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청초호는 속사호, 속진호, 술랑포, 쌍성호, 논뫼호 등 다양하게 불렸는데, 청초호 호수위에 투영되는 설악산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 화가 김홍도가 영랑호를 그린 산수화를 남겼다.
○ 1609년(광해군 1년) 강원도 춘천, 원주, 강릉, 건성, 양양 등지에 UFO가 출현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양양부에 8월 25일 미시(未時, 13~15시 사이)에 김문위(金文緯)의 집 뜰 가운데 처마 아래의 땅 위에서 갑자기 세숫대야처럼 생긴 둥글고 빛나는 것이 나타나, 처음에는 땅에 내릴 듯 하더니 곧 1장 정도 굽어 올라갔는데, 마치 어떤 기운이 공중에 뜨는 것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인조(1595~1647)대 신흥사 승려인 설정스님(說淨)과 다섯살 동자와 관련된 설화로 통해 오세암이라는 절이 유명해졌다
.
○ 1757년에 완성된 《여지도서》에는 속초지역의 마을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소천면(所川面)에 속진리(175명), 속초리(281명), 논산리(97명), 부월포리(86명)가 있었고, 도문면(道門面)에는 장항리(승려 49명), 도문리(192명), 내물치리(52명), 대포리(104명), 외옹치리(238명)가 있다.
○ 1675년 숙종때 조정회의를 거쳐 함경도 덕원에서 유배 중인 우암 송시열을 경상도 장기로 이배(유배지를 옮김)할 것을 결정했는데, 때는 5월 25일 우암의 유배행렬이 속진, 속초를 거쳐 외옹치 고개로 넘어 들었다. 한참을 가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암의 일행은 비를 피하기 위해 내물치촌[(內勿淄村)의 정립이라는 사람 집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다. 정립의 집 기둥에 ‘삼전시호인개신(三傳市虎人皆信), 일철군봉부역의(一掇裙蜂父亦疑), 세상공명간목안(世上功名看木雁), 좌중담소신상구(座中談笑愼桑龜)라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이 글귀에 대해 ≪송자대전(송시열이 지은 글 모음집)≫에서는 “정(鄭)의 말에 의하면, 지난해 5월에 승려도 아니고 세속 사람도 아니며 선비 같기도 하고 천인(賤人) 같기도 한 어떤 사람이 이 글씨를 써 두고 가면서 내년 5월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는데, 오늘 귀하신 걸음이 기약에 맞춰 와서 보시게 되니 이상스럽다고 하였네.
그 필치도 매우 기이하였지만 위 구절은 위에서 차례로 내려쓰고 아래 구절은 밑에서 위로 거꾸로 써 간 것도 알 수 없는 것이었네. 다만, 아래 구절의 이른바 상구(桑龜)는 바로 오늘날 마땅히 가슴에 새겨 담아야 할 것이었네. 북쪽에 있을 때 서울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를 두 번이나 구동(狗洞-윤휴의 무리들)이 가로채 갔고 그의 심복들이 안팎에 두루 깔려 있으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그 시(詩)를 허암(虛菴) 정희량(鄭希良)이 유자광(柳子光)이 득세한 때에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네.”하였다.
○ 속초시지에 의하면 내물치리(內勿淄里)는 조선조 때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왔다가 폭우로 머물게 되면서 '물에 잠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물치(勿淄)'라고 했다고 전다.《송자대전》에는 ‘물치(勿緇)’로 기록되어 있다.
○ 영랑호반 암석에 영랑호(永朗湖) 3글자가 암각되어 있는데,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
5. 일제강점기
○ 1914년 일본은 속초지역의 2개면인 도문면과 소천면을 도천면(道川面)으로 통합하였다.
○ 1919년 4월 5일 물치장날을 기하여 도문리, 대포리, 부월리와 논산리 등 사람들이 면사무소(현. 중도문 노인회관)에서 모여, 대포리에 있던 일본 순사주재소앞까지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이에 놀란 일본 순사들은 가족들을 배에 태워 바다에 띄우고는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하며 애원하였다.
○ 1932년부터 청초호를 전쟁물자 조달을 위한 항구로 개발하기 위하여 지금의 갯배가 운영되는 곳을 확장하고 방파제를 건설하였다.
○ 1937년 12월 1일 양양~원산간 동해북부선이 개통되었다.
○ 1937년 7월 1일 ‘도천면’을 ‘속초면’으로 개칭하고 ‘속초리’를 ‘속초 1구~4구’로 분리하여 ‘구제(區制)’를 실시하였다.
○ 1941년 11월 속초시장 뒤편 7만여평의 부지에 속초공설운동장이 건립되었다.
○ 1942년 10월 1일 부령(府令) 제104호로 ‘속초면’이 ‘속초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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