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고성양양의 역사

속초 후릿그물이야기

속초애인 2024. 6. 12. 13:39

지금은 어종고갈로 인해 사라졌지만,여름 피서철 조양동에 위치한 속초해수욕장에서는 수 년 동안 피서객들의 즐길거리를위한 이벤트가 개최된 적이 있었다. 배 한척이 백사장에서 그물의 한쪽을 끌고 바다로 나아가 고기가 모여든자리를 돌아 다시 백사장으로 그물을 가져오면 그물 양쪽에 체험객들이 붙어 그물을 끌어당겨 고기를 잡아보는‘후릿그물 체험’이었다. 

끌어당긴 그물 안에는 각종 고기, 조개 등이 넘쳐나 체험객들이 한 마리 이상씩 나눠가져가 구워먹기도 하고, 회를 떠서 먹기도 하였다.


얄미운 것은 그물 당기는 것이 힘들다고구경만 하고 있다가 고기가 많이 잡히니 얌체처럼 줄을 서서 고기를 타가는 사람
들이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본고에서는 후릿그물의 어원과 역사그리고 일제강점기 시절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 제10호(1927. 12. 20. 발간)에 소개된 우리 지방의‘후릿그물 이야기(메리치 잡이)’에 대해 살펴보고자한다.


조선후기 ‘휘리’란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는 ‘후릿그물’이란 명칭 중‘후릿’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의미를 살펴보면‘휘두르다’라는 의미로 팔 휘젓는 모양이 후릿그물의 작업방식과 유사하다. 바다나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큰 그물로서,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지인망(地引網)’의 일종으로, 그 구조가 간단하고 사용법도 간단하여 이미 원시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두산백과>에 의하면‘후릿그물(Seine Net)은 자루의 양쪽에 기다란 날개가 있고, 그 끝에 끌줄이 달린 그물을 기점(육지나 배) 가까이에 투망해 놓고, 끌줄을 오므리면서 끌어당겨, 그물을 기점으로 끌어들여서 잡는 데 쓰이는 어구·어법으로‘인기망(引寄網)’이라고도 하며, 이 어법은 그물이 투망된 위치부터 기점까지의 사이에 있는 대상물밖에 잡을 수가 없는데, 후릿그물은 표층과 중층어족을 주 대상으로 하는 좁은 의미의 후리(浮引網)와 저층어족을 주대상으로 하는 방(底引網)으로 나눌 수있다.

 

 후리는 해안 가까이 얕은 곳에 있는 대상물을 잡는 어법이며, 갓후리(地引網)에서 시작하여 배후리(船引網)로 발달했다. 방(손방)은 후리보다는 조금 깊은 곳에 있는 대상물을 잡는 어법이며, 1척의 배로써 어구를 마름모꼴로 투망한 후, 배를 고정시켜 놓고 양쪽 끌줄 끝부터 가지런히 사람의 손으로 끌어당겨 고기를 자루그물에 후려모아서 잡는 방법이다.’이라고 한다.


후릿그물과는 별도로‘배후리(Boat Seine)’라는 것이 있는데, 배후리어법은 후리 또는 갓후리라고 한다. 그물을 해안에서 끌어올리는데 배후리는 배에서 그물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물을 반씩나누어 실은 두 척의 배가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서 자루그물을 먼저 투입한 후 서로 떨어지면서 날개 그물을 투입하면 서 어군을 둘러싸고, 배가 해안에 도착하면 배에서 밧줄을 내려 해안의 바위나 나무 등에 묶어, 그물을 당기는 힘에 배가 딸려가지 않도록 하고, 갑판 중앙의 물레로 줄과 그물을 감아올린다고 한다.


속초시 노학동 속초시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4척이 배가 사각형모양으로 마주보며, 그물에 잡힌 멸치를 끌어올리
는 모형이 배후리의 한 종류이다.
문헌상으로 후릿그물이‘휘리(揮罹)’라는 명칭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 시기는 조선 후기부터였다.


<한국민족대박과사전>에 의하면, 1752년(영조 28)에 제정된 <균역사목均役事目> 해세(海稅, 어업관련 세금)조에는 경상도의 어업 중 어장(漁場)을 설명함에 있어서 강에는‘강어휘리장(江魚揮罹場)’이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강에서 후릿그물을 쳐서 담수어나  ‘소하’성(溯河性:바다에서 육지의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성질) 어류를 잡는 어장을 말한 것이다. 후릿그물은 과거 하천에서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경세유표(經世遺表),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행정 기구의 개편을 비롯하여 관제·토지제도·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의 개혁 원리를 제시한 책.>에는 경상도의 해세를 논하는 가운데‘강구(江口)에서 큰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도 역시 어장이라고 부르는데 방언은‘휘리’라고 한 것이 보인다. 역시 하천에서 후릿그물을 치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후릿그물은 해안에서 각종 어류를 어획하는 데에도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균역사목(均役事目), 1752년(英祖28)에 균역청(均役廳)의 원사목(原事目)이 반포(頒布)된 후 이듬해에 원사목을
수정보완한 추사목(追事目)이 반포된 후, 여러 차례에 걸친 개정이 있게 되자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한 엮은 책
>의 함경도 해세에 관한 것을 보면‘덕원청어휘리세(德原靑魚揮罹稅)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덕원지방에서 청어를
후릿그물로 잡고 있었음을 전하는 것’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 1808년에 서영보(徐榮輔)·심상규(沈象奎) 등이 왕명에 의해 18세기 후반기부터 19세기초에
이르는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해 편찬한 책> 해세조에는 강원도의 어업에 대하여 적으면서‘휘리가 여러 곳에
있는데 그 세금은 많은 것은 10냥, 적은것은 4∼5냥이라고 하고 있다. 강원도 연안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은 자연적 조
건이 후릿그물과 같은 지인망을 사용하기에 적합하므로 과거 지인망을 많이 사용하였던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임원경제지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실학자 서유구(徐有榘)가 편찬한 조선 후기에 농업정책과 자급자족의 경제론
을 편 실학적 농촌경제 정책서>에서는 당망(搪網)이라는 것을 설명하고‘그 속명이‘휘리망’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해중(海中)의 대망으로서 칡덩굴을 벗겨 가는 새끼를 꼬아 만드는데 길이가 수장(數丈),너비는누백파(累百把)되는것
이 있는데, 여기서 너비라고 말한 것은 띠처럼 기다랗게 생긴 후릿그물의 길이 를 말한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한말엔 가장 중요한 어업으로 성장후릿그물을 강이나 해변에서도 사용하는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류를 잡는다고 하였다. 특히, 부호(富豪)는 명주실로 만든 대형 후릿그물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는 상당히 발달된 후릿그물이 19세기 전반기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08년에 발행된 <한국수산지 (韓國水産誌)> 제1집에는 각종 어구의 설명에서‘지예망(地曳網:地引網)’이라는 것을 들고 그 밑에‘휘리망’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전자는 일본식 명칭이다.
이 지예망에는‘온지예망(鰮地曳網)’과‘대지예망’의 두 종류가 있는데 어포부(魚捕部)에낭망(囊網,자리그물)이 달려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나 드물게 그것이 달려 있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래‘후릿그물’이라 하면 다른 지인망과 구별되는 것이 낭망이 없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낭망(자리그물)이 없는 지인망을 후릿그물이라고 하였다.


‘온지예망’은 우리말로‘ 멸치휘리그물(滅魚揮罹網)’이라고 기재하고 있다. ‘망지(網地)’는 면사제인데 종전에는 자가제 면사를 사용하였으나 근래에는 일본산 망지를 구입하여 사용한다고 하였다. 어망의 형태는 대체로 장방형이다.
이는 그 이름이 표시하듯이 멸치를 잡는 데 사용되었다. 어법은 4, 5명의 어부가 어망을 어선에 싣고 나가 해변에 몰려든
멸치떼를 포위한 뒤 육지에서 어망을 끌어올려 멸치를 잡는 것인데 어부 총수는 14∼15명이었다.


한말에 이르러 멸치후릿그물 어업은 가장 중요한 어업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멸치의 대군을 포위하였을 때에는 서로 눌려 폐사하여 해저에 가라앉는데 심한경우에는 그 두께가 수 촌에 달하고 해저가 온통 은백색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대지예망’은 강원도 연안 특유의 어망으로서 방어·도미·삼치·청어 등 비교적 큰 어류를 어획하는 데 사용되었다. 망지는 삼 껍질로 만든 실과 마사(麻絲)와 칡덩굴섬유를 혼용하여 만든 것, 그리고 순전히 일본산 면사로 만든 것이 있었다. 이것은 어망의 규모가 멸치후릿 그물보다 컸으므로 조업에 있어서는 25명 정도의 어부가 상시 종사하였다.


후릿그물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수백 통이 사용되고 있었고, 주로 우리나라 사람이 이를 사용하였으나, 효율적인 다른 어구가 발달함에 따라 그 사용량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오늘날에는 연안 가까이로 오고가는 어류 자원이 격감하여 후릿그물어업은 산업으로 성립하기는 어렵게 되었으며, 다만 경상북도 울진, 영덕 등 일부 지방에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본 글은 속초문화원의 도시변천사기록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