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진리(束津里)를 아시나요?
이름 정속진(鄭束津, 1882~1956)!
이 분의 제적등본(호적)을 보면 단기 4215년(서기 세는 법 : 4,215년에서 단군이 즉위한 해 2,333년을 뺌)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속진리에 거주하셨다고 표시되어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동명동 361번지, 구.동명동 동사무소 근처이다.
사실 이분은 필자의 큰 증조할머니가 되신다. 위인전을 쓰자는 것이 아니라 이 분을 이름이 우리 속초의 옛 지명이였던 ‘속진리(束津里)’ 의 ‘속진’과 같기 때문이다. 속진리에서 태어나셔서 ‘속진이’라고 지으셨다고 한다. 당시는 여성의 이름이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증조할머니의 어미니인 ‘김경주’처럼 성의 본관(本貫)을 이름으로 표기하던가, 00씨(氏), 00소사(召史)라고 표기 하기도 한다.

조선 태종 때에 조선 8도에 면리제(面里制)가 실시되었는데, 1757년(영조 33년)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편찬한 ≪여지도서≫방리(坊里)조에는 양양군 소천면(所川面)에 속진리(175명 거주), 속초리(281명), 논산리(97명), 부월포리(86명)를 두었다고 한다.
1911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지지자료≫ 포구명(浦口名)에는 도천면의 옹진(甕津), 소천면의 속진(束津)이 표시되어 있다. 옹진은 도문면의 대표 항구이고, 속진은 소천면의 대표 항구인 것이다..
1914년 일제는 전국을 13도로 나누고 그 밑에 부·군·도(島)를 두었으며 전국의 군을 220개로 정리하였는데, 이때 도문면과 소천면을 합병하여 도천면으로 만들고 속진리 또한 속초리로 편입시켰다. 일제는 전국의 지명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마구잡이로 여러 마을을 통합시켰는데, 속진리란 지명또한 이때 희생당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발간된 『조선도부군면정동리개정구역표』를 보면 도천면은 장항리, 상도문리, 중도문리, 하도문리, 내물치리, 대포리, 외옹치리, 부월리, 논산리, 노리, 속초리의 11개리로 되어 있는데, 이때도 속진리가 보이지 않는다.
《강원도 양양군읍지》의 지도에도 ‘옹진(지금의 대포와 내옹진)’과 ‘속진’이 대표적인 마을로 표시되어있다. 또한 조선시대 역(驛)이 아니면서 옹진과 속진에 이참(里站, 역마을을 의미, 즉, 여행객들을 위한 숙소가 있는 곳)이 있던 곳으로 봐서 어업을 통한 사람의 왕래가 잦았던 곳으로 비교적 큰 마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속진’이라는 지명은 문헌상에 기록되어 있을까? 기행문성격의 개인문집이지만 기록상으로나마 속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시기별로 보자면 영조 때의 문신인 이현경(李獻慶, 1719~1791, 한성판윤 엮임)은 그의 호(號)를 딴 《간옹선생문집(艮翁先生文集)》1권에 ‘청초호를 지나며(過靑草湖)’라는 시(詩)에 ‘사군환이속진민(使君還羡束津民, 임금의 명령에 따라 온 군신이 오히려 속진의 백성을 부러워 한다) ’이라는 대목에서 ‘속진민(속진에 사는 백성)’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또한, 조선후기 문신인 조병현[(趙秉鉉, 1791~1849)가 지은 시문을 엮은《성재집(成齋集)》중 금강산 여행을 기록한 『금강관서(金剛觀叙)』이란 별집(別集)에서도 ‘5리를 지나니 영랑포(지금의 영랑호를 말함)에 이르고, 속진속사포를 지나 (五里至永郞浦。過束津束沙浦)’라는 문장에서 속진과 속사포(속사포 지명에 대한 연구는 추후 진행)가 동시에 나온다.
그렇다면, 속진리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조선시대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하던 비변사(備邊司)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 1745~1760년 사이 편찬》양양(襄陽)편에는 속초감리교회에서 속초등대까지 이어져 있는 산을 '속진산(束津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속진리의 위치를 설명한 자료는 일제강점기때 쓰여진 《최신조선지리》가 유일한데, 이 책에 ‘속진은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도천면(道川面)에 속한다. 남북에 작은 돌출이 있고, 만형(灣形)을 이룬다. 만의 깊은 곳의 서쪽에서 북방에 있는 돌각(突角), 즉 비선장(비선대를 일컬음)이라는 좋은 곳이 있는데 약간 높은 언덕이 둘러싸고 있으며, 수심이 깊어 기선이 정박하는데 적합하다. 군내 유일한 기박(汽舶-큰배)의 기항지이다. 간성군(杆城郡) 사진(沙, 지금의 장사동)에서 남쪽으로 10정 떨어져 있고, 양양으로 4리(오류? 실재 35리)라서 교통이 편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양양 서면의 철광석을 수송하기 위해 대포항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속진이 가정 규모가 컸던 항구라고 볼 수 있다.
여담이지만 대포항이 개발된 이유는 바다에서 속진항으로 들어오는 해로(海路)에 ‘건너풀’이라는 거대한 ‘수중암초‘ 때문이다. 지금은 방파제밑으로 뭍혀버렸는데 수많은 인명을 빼앗아갔다고 한다. 수중암초발파기술이 부족했던 일제강점기 건너풀이 있는 속진항보다는 수면이 깊고 넓은 대포항이 속진항을 대신해 기항지가 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위 두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남북에 작은 돌출이 있고, 만형(灣形)을 이룬다'는 내용으로 보아 속진이 지금의 영금정(靈琴亭) 일대라는 것은 확실하다. 좀 도 넓게 말하자면 영금정(靈琴亭) 일대에서 수복탑(收復塔)으로 이어지 해안을 중심으로 항구가 만들어졌고, 활발한 어업활동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된 곳이 ‘속진리’이다.
지금은 영금정 등대기슭로 옮겨갔지만, 옛날 성황당도 속진리(속초감리교회 동쪽 기슭)에 있었고, 등대도 속진리에 있다.
속진이라는 어항은 지금의 동명항이다. 속초항 북측방파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속초의 대표적 어항(漁港)이었다. 그러다가 ‘동명항’이 ‘산업항(産業港)’으로 그 용도가 바뀌며 ‘속초항(束草港)’으로 명칭이 변경 되었고, 옛날 어선들이 정박하던 곳은 매립되어 지금의 동춘국제여객선터미널, 컨테이너 야적장 및 각종 활어센터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속진’이라는 ‘항구’는 지금은 거의 그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지만, ‘속진’이라고 ‘마을’은 남아있어 역사깊은 항구도시로서의 근대사를 말해준다.
정상철 속초문화원 속초시향토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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